반쯤 열어둔 차창으로 바람이 밀려든다. 짠 내음 섞인 바람 냄새가 미처 보기도 전에 바다가 지척임을 알려준다. 버석한 모래사장 앞에 차를 멈추고 그렇게 한참을 바라본다. 얼마 만이더라.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꽤 오래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파도소리가 오랜만에 방문한 낯선 사람을 반기는 듯 잔잔하다. 조수석에 구겨져 있는 카디건을 들고 차를 나선다. 꼼꼼하게 문의 잠겼는지 확인을 한 후에야 걸음을 옮긴다. 장난스러운 바닷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졌다 풀리길 반복한다. 왜 혼자 왔냐고 타박하는 것 같다.
"애인이나 친구들이랑 바글대며 여행 다니는 건 어렸을 적에나 했지. 취업하고 일에 치여 살다보니 오늘이더라."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의 바닷가 라는 건 넋두리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아예 모래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갑고 건조하고 쓸쓸하다.
"요즘? 도전을 하려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떠오르고, 변화를 꿈꾸면 타인의 시선에 질타당하는 악몽이 되어버리는 느낌이야. 평범한 일상이고 그래서 재미없고 지루한 고민들만 가득하지."
'만기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번엔 어디로 이사 가야하나.'
'대출 금리가 또 오른다는데 어쩌지.'
'데면데면한 친구의 결혼식을 가야 할까, 가면 축의금은 얼마를 내야 되려나.'
'올해 핸드폰을 바꿀까, 그냥 1년 더 써볼까.'
잠깐 사이에 뇌리로 현실이 물밀 듯 들어와 범람했다.
"시시한 고민이지? 그렇다고 배부른 소리 한다며 비난하지는 말아줘. 나도 내 생활에 크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거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 나는 그저 조금 무료할 뿐이야."
조금 전보다 거센 파도가 더러워진 하얀 운동화의 바로 코 앞까지 들이닥친다.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모래가 쓸려 나간다. 파도가 지난 자리에는 물기를 머금은 조개껍데기가 생겼다. 살살 모래를 털어내며 주워 들어서 부옇게 밝아오는 햇빛에 이리저리 비춰본다.
"예쁘네."
작고 하얗고 반짝이는 듯도 하다.
"모래사장의 변주인가."
멍하니 조개를 보고 있자니 이것 때문에 바다를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바람이 분다. 나는 자그마한 조개껍데기를 카디건 주머니에 넣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걸음마다 모래가 옅게 패여 흔적을 만든다.
아침부터 영업을 하는 식당이 있을까 싶었는데, 나를 제외하곤 다들 부지런 한가보다. 쌀쌀한 날씨에 국물이 생각난다. 발길 닿는 곳으로 들어가서 주문을 한 후, 멍하니 가디건 속 조개를 만져본다. 얼마 안 있어 음식이 나온다. 맑은 대구탕을 한 숟가락 떠먹으니 따끈한 온기만큼 몸이 덥혀진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배가 부르다. 고개를 돌리자 창틀 위에 얹어진 아침 햇살이 보인다. 창 밖으로는 햇빛 조각들로 넘실거리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신기하게도 무미건조한 마음에 알록달록한 색채가 덧씌워진다. 한참을 그리 있으니 햇빛은 생소한 곳에서 보게 된 나를 향해서도 어쩐 일이냐는 듯 따스히 내려앉았다. 나는 창가에 앉아 몸도 마음도 노곤 해져서는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바다를 보러 오게 된 이유를 떠올린다. 정말 별 것 없는 충동적인 마음이었다.
주말에 한 친구의 생일을 겸해서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사이라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어쩔 수 없이 너도 나도 변했는데 우리 사이는 그대로라며 웃고 떠들어야 한다. 어떨 땐 정말 그대로인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서로 과거의 나라는 가면을 쓰고 과거의 잔상을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혼란스럽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싱숭생숭한 그런 날. 다들 걱정과 푸념으로 요즘 사는 얘기를 시작해서 각자의 은근한 자랑으로 끝을 맺었다. 너무나 친숙한 얼굴이기에 더욱 낯설게 느껴지는 말들이 주변을 맴돈다.
그 낯섦 사이 부유하던 바다. 그 단어에 꽂힌 건 왜일까.
"다 같이 여행 다닐 때가 진짜 좋았는데! 이거 봐봐, 우리 완전 애기야~"
"그러게, 진짜 어렸네."
간간히 대꾸를 하며 추억이 담긴 사진을 넘겨본다. 지나온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는 걸 볼 때마다 사람보다는 그 배경에 눈이 닿는다. 우리는 이렇게 마모되어 흘러가는데, 사진 속에서 우리를 둘러싼 바다만은 그대로다. 그래서 난 충동적으로 휴가를 내고 차를 렌트 해 바다로 향했다.
아무튼 즉흥적인 오늘의 여행은 시작부터 꽤 괜찮았다. 식당을 나와 다시 해변을 따라 걷는다. 잘 정돈된 도보 위를 걸으면서 해변을 이루는 모래 알갱이를 바라본다. 이 작고 평범한 모래들이 모이고 모여서 백사장을 이뤄내는 거겠지. 파도에 쓸려 가기도 하고 다시 밀려오기도 하면서, 가끔 예쁜 조개와 소라를 품고, 간간히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에 아파하기도 하면서. 그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면서 이 풍경을 완성하는 걸 테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니 하얗고 부드럽고 따스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뗀다. 길 위에 깨진 조개 조각들이 뒹굴고 있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개를 쓸어본다. 나는 여기 무사히 있다고 손을 잡아 온다.
"바다가 준 선물인가?"
"나는 널 기쁘게 할 수도 있고, 어떨 땐 상처 입히기도 해."
"그럼 너는 희망이구나."
무채색 같은 삶에도 희망은 오는구나. 쉴 새 없이 파도가 치고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에도 깨지지 않는 희망이 피어나는구나. 새삼 길가에 나뒹구는 조개의 파편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 손에 쥔 조개껍데기를 끝까지 잃지 않고, 잊지도 않고 가지고 갈 수 있을까?
새삼 조개를 내어준 푸른 바다가 하염없이 깊고 넓게 느껴진다. 나는 스쳐 지나가지만 바다는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고 이 자리에 있어 주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주변엔 어쩔 수 없이 변하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 것들은 아무리 붙들어 보려고 힘을 줘도 모래알처럼 흘러내린다. 혹은 반대로 무리해서 바꾸려 해도 때가 아니라는 듯 묵묵부답인 돌 덩어리들도 있다. 그럴 땐 파도를 기다리면 된다. 그것은 모래알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견고하게 묶어 주기도 하고, 묵직한 바위를 둥글게 다듬어 굴려서 우리의 삶이 나아가도록 하며, 가끔은 오늘처럼 하얀 조개를 쥐여주어 삶에 위안을 불어넣는다.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 저 멀리 렌트해 온 차가 보인다. 어느새 원점으로 돌아왔다.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아침의 안개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바닷가는 화창하다. 신기하다. 같은 공간인데도 이렇게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허무할 만치 아름다운 풍경에는 새벽의 씁쓸함과 아침의 고요함과 정오의 생동감이 모두 녹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 한낮의 활력과 저녁의 여유를 품고, 밤의 나른함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곤 다시 새벽이 오겠지. 사람의 생과 다름이 없구나 싶다. 멈춰있는 듯 보여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점과 다시 돌아오게 되는 진리가 있다는 것이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치는 바다를 온몸으로 맞으며 자기만의 모양과 색을 내고 있다. 그중에는 나도, 그리고 당신도 있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평이하고 재미없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무언가 변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시간이 지나고 돌아봤을 때 평화로운 한때였었지 하고 생각되는 날일 수도 있지 않을까.
변하고 사라지고 생겨나는 내 삶에도 파도가 친다. 언제까지나 바다는 나를 두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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