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본 바다는 손바닥 두개를 합쳐놓은 것보다 조금 큰 네모난 유리를 통해서였다. 먹먹해지는 귀를 누르기를 잠시, 얼마 후 오밀조밀한 빌딩들을 지나 하얀 구름들 속을 들어가더니 파랑이 펼쳐졌다. 내가 본 게 하늘인지 바다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이 든 것 같다. 부산스러운 소음과 덜컹거리는 기체를 느끼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낯선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여행의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 속에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국내여행조차 멀리 못 가본 내가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왔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입국심사를 받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푸른 바다가 아른거렸다.
WELCOME CEBU
여권을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으면서 공항을 나서서 이 문구를 보자마자,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감각으로 여기가 외국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 순간에도 창 밖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들뜬 마음이 내려 오질 않았다. 서툴게 체크인을 하고 짐을 내려놓자마자 시간에 쫓기듯 바다로 향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에메랄드 빛 바다가 지금까지의 고생을 위로해주는 듯 반짝였다. 한참을 구경하며 걷다가 내일을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둑어둑 해진 바다를 배경으로 2박 3일 간의 일정을 되새기며 잠들었다.
둘째 날은 일어나자마자 점심에 가까운 아침을 먹고 스쿠버다이빙 픽업 차량에 탔다. 간단하게 코스와 안전수칙, 장비 설명을 듣고 옷을 갈아입은 뒤 수영장에서 잠수와 수신호 연습을 했다. 내려가고 올라가고 멈추고 숨쉬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서야 진짜 바다로 향했다. 배의 갑판에 걸터앉아 묵직한 산소통을 메는 순간에도 내 발 밑에 출렁거리는 물이 바다라는 자각은 희미했다.
"Are you ready?"
심장이 아득히 먼 곳에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내 몸을 울리는 울림이 점점 거대해졌다.
"...Yes!"
"Okay! 3, 2, 1. Go!"
출렁거리는 파도를 따라 내 몸도 흔들렸다. 가이드를 따라서 호흡기를 입에 물었다. 이쯤 되었을 때는 심장이 내 몸 안에서 울리는 건지 내가 고동치는 심장 속에 들어와 있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수신호에 맞춰서 천천히 잠수했다. 눈을 감았다 뜬 그 순간 쨍한 하늘과 빛에 반짝이는 바다는 사라지고 푸른 장막이 내려앉았다. 빛을 받아 흔들리는 색색의 파란 비단이 수천, 수만 장 겹쳐있는 것 같았다. 가이드와 연결된 줄 덕분에, 넋을 놓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착실히 이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엔 색색의 물고기들이 물살을 헤치며 오가고 있었다. 가이드가 설핏 웃는 것처럼 날 보더니 작고 하얀 솜 뭉치를 쥐여줬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빵 조각이었던 것 같다.) 이건 내가 힘을 주는 대로 솜털처럼 하얗게 흩날렸는데, 이렇게 부서지는 조각들을 따라 물고기가 모이거나 흩어지곤 했다. 내 주변은 알록달록 물들다가 손에 아무것도 없어질 즈음 다시 잔잔해졌다. 이후엔 조금 더 깊이 내려가서 산호와 말미잘, 조개를 구경하다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푸흡 - 후으..."
마스크를 벗고 배 위로 기어올라왔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와 하늘이 맑았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영화의 한 구절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지어졌다. 어땠냐는 가이드의 물음에 손과 표정을 모두 동원해 최고였다고 말해줬다. 물론 물 먹은 수트와 장비들은 무겁기 그지 없고 머리카락은 소금기에 절어 있었지만 우리는 눈만 마주쳐도 방긋 웃었다. 가이드 분들과 사진을 보면서 웃고 떠드는 순간, 바다가 우리를 연결해 줬다는 이상한 믿음마저 생겼다.
샤워부스에서 대충 씻고 시내로 돌아오니 햇살이 한풀 꺾인 느지막한 오후가 됐다. 쇼핑센터를 기웃거리다가 LED 장미정원이 유명한 바닷가로 이동해 저녁을 먹었다. 너무 완벽해서 이대로만 여행이 끝난다면 바다와 사랑에 빠질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리를 하나 건넜는데 차창 너머로 꽤 큰 언덕이 보였다. 바닷가에 있기엔 조금 이질적이지 않나 싶은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마지막 날, 느긋하게 즐기자 싶어 신청한 요트 투어를 가는 길에 어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아름다운 바다 위에 존재하는 그 언덕은 쓰레기의 산이었다.
투어를 모두 즐기고 귀국하는 비행기에 앉으니 다시 그 거대한 언덕이 떠올랐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쓰레기는 알차게도 쌓여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온갖 매체에서 환경문제가 심각하고 바다를 떠도는 쓰레기가 많다고 해도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았었다. 솔직히 나 살기 바빠 여유롭게 여행도 못 가 봤는데 그런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있었을리 없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끝을 모르고 쌓여 있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언덕으로 보일 정도의 쓰레기들. 투명하고 시원한 바다를 비웃기라도 하듯 존재감을 뽐내던 불쾌한 쓰레기들. 한 명의 인간인 내가 바다의 품에서 기쁨과 위로와 경이로움을 느끼는 동안, 바다는 무지한 인간이 토해내는 막대한 양의 쓰레기를 끌어 안고 있었다. 이러한 불균형적인 관계를 나는 많이 봤다. 우리는 이 관계의 끝이 오기 전에 바로 잡을 수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의 작은 창 아래로, 올 때와 같은 끝 없는 파랑이 보였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저 푸르름이 언제까지 지켜질지 의문이 들어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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