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책 읽는 꿀벌입니다 : )
20세기 초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의 생애를 담은 김영하 작가의 검은꽃입니다.
사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멕시코로 이민을 간 한인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하와이의 플랜테이션은 언뜻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민자들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었습니다.
'검은 꽃'은 여태 알지 못했던 역사의 일면들이 얼마나 많은지 돌이켜보게 했어요.
<책소개>
저서 : 검은 꽃
저자 : 김영하
발행일 : 2003.08.20
페이지 : 440p
등장인물 : 김이정, 조장윤, 김석철, 서기중, 박정훈
이연수, 이종도, 이진우, 부인 윤씨
최선길, 바오로(박종수), 박수무당
권용준, 요시다, 돈 카를로스 메넴, 이그나시오 벨라스케스 등
<줄거리>
제 1부
1904년 봄 조선 제물포항에는 황성신문을 보고 다양한 사정의 사람들이 모였다. 대륙식민회사의 주도 아래 꿈에 부푼 고아, 제대군인, 힘 없는 방계 황족, 소매치기, 파계신부, 박수무당, 통역관 등 1033명의 조선인들은 멕시코를 향해 출발했다. 한 달이 넘는 항해 기간 동안 비좁은 선실에서 지내며 신분의 격차는 허물어졌다. 항해 중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고 제대로 씻고 먹지 못해 이질이 돌아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고아 김이정은 선박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일본 탈영 군인 요시다로부터 동성애적 구애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정은 황가 이종도의 딸 이연수와 정을 통하고 멕시코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멕시코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살리나크루스 항구를 거쳐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까지 이동했다. 이후 일주일 동안 농장주의 지목을 받은 1032명의 조선인들은 22개 농장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선박용 로프의 주재료인 '에네켄' 농장으로 대농장(아시엔다)의 봉건적 체제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일급을 받은 후 농장의 식료품점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주고 음식을 사야했다. 황족 이종도는 일을 하지 않아 어린 아들 이진우가 일을 나섰다. 제대군인 조장윤을 중심으로 봉기를 하여 채무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농장도 있다. 구교(천주교)의 광신도가 농장주였던 곳에서는 굿을 치르다 박수무당이 샤먼으로, 파계신부 바오로가 사탄으로 몰리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김이정은 농장을 옮겨서 이연수와 같은 농장으로 가게 되는데 둘의 모습을 본 통역 권용준의 눈에 띄어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내지게 된다.
제 2부
이연수는 혼자 아이를 낳고 권용준의 첩으로 지내게 되고 김이정은 미국으로 가기 위해 아시엔다를 전전하며 돈을 모은다. 하지만 멕시코 정세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국경을 넘지 못하고 판초 비야의 혁명군 용병으로 참전하게 된다. 제대군인 중 일부는 2~4년의 기간 동안 돈을 모아 합법적으로 아시엔다를 나가 군벌정치와 같은 숭무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대한인북미총회와 접선해 멕시코 한인들의 현실을 알리고자 한다. 이들은 멕시코 한인의 4년 계약 만료 시 받는 수로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9년 5월 12일 계약이 종료되어 채무노예생활이 공식적으로 마무리 됐으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장윤을 필두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산하 메리다 지방회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멕시코 한인들을 하와이 플레테이션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꿈꾸지만 미연방정부의 허가가 나지 않아 무산된다.
혁명을 통해 멕시코 대통령 디아스의 장기집권 체제가 끝나고 마데로가 뒤를 잇는다. 이후 우에르타 장군, 주지사 카란사가 쿠데타를 통해 정부군을 장악했으며 북부의 판초 비야, 남부의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혁명군으로 부상했다. 권용준은 이연수를 데리고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지만 중간에 연수가 돈을 훔쳐 달아난 후, 차이나 타운에 눌러 앉는다. 연수는 얼마 못 가 노예처럼 팔리다가 한 중식당에서 박정훈을 만나 도움을 받고 그의 아내로 살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농장에서 아이도 데려오게 된다.
제 3부
이정은 오브레곤과의 전투 이후 메리다 지방회에서 지낸다. 어느 날 과테말라 혁명군으로부터 지방회에 용병 계약 제안이 오게 되고 김이정과 조장윤을 포함하여 총 44명이 계약을 하게 된다. 과테말라 카브레라 대통령의 독재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의 게약으로 이들은 과테말라 북부 띠깔로 향한다. 탈영병을 제외한 40명의 한인은 띠깔에서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이정은 이 사실을 박정훈과 일본 대사관에 있는 요시다에게 편지로 알린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과테말라의 혁명군과 한인 용병은 결국 정부군에 의해 궤멸된다.
<명대사>
1905년 5월 27일 새벽 네시 사십오분, 일본 연합함대의 선제공격으로 거의 스물네 시간 동안 지속된 동해 해전에서 발틱함대는 궤멸적 타격을 입고 손을 들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포로가 되었다. 일본 연합함대의 승전 소식은 고종 황제의 막연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역사엔 요행이 없었다.
- 제 1부 10 中 -
이종도는 오래 남아 바다와 들쭉날쭉한 경기도 서부의 해안선을 눈으로 좇았다. 그의 조상들인 조선의 왕 중에는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통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다녀온 신하가 왕을 배알하면 왕은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일본에 갔는가? 전하의 함선을 타고 갔나이다. 배에는 몇사람이나 탔는가. 각 배에는 군졸과 선원을 합하여 30여 명이 탔습니다. 그제야 왕은 조용히 물었다. 짐은 아직도 궁금하다. 그 많은 사람이 탄 무거운 배가 어찌 물에 가라앉지 않고 뜰 수 있단 말인가. 왕궁으로부터 1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한강에도 나와보지 않은 왕이 부지기수였다. 신하는 왕의 무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충분히 이해시킬 방법을 찾는다. 소신도 아직 그 이치를 충분히 알지 못하오나 전하의 어부와 수군 들은 일찍이 그 이치를 깨달아 잘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가벼운 나무와 기름으로 그 도움을 삼는 것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문신(文臣)이었다. 사물과 도구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왕과 신하는 묘한 표정을 교환하고 바다와 배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이종도는 그들의 후손이었다.
- 제 1부 11 中 -
그녀는 배가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 번이나 토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육체의 명백한 동물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배가 고프고 속이 울렁대다가도 또 참을 수 없는 요의에 시달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육체가 아무런 장막도 없이 뭇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데 있었다. 시선은 말을 걸어오지도, 친절하게 웃어주지도 않았다. 아니 웃음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무수한 시선이 제 몸에 와서 꽂힐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육체라는 작은 감옥에 갇혀 있는 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게우고 싸고 자고 먹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 제 1부 14 中 -
저기, 나는 안 돌아가려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배에 올라탄 이래로 그같은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까짓 나라,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돌아가겠는가. 어려서는 굶기고 철드니 때리고 살 만하니 내치지 않았나. 위로는 되놈에, 로스케 등쌀에, 아래로는 왜놈들 군홧발에 이리 맞고 저리 굽신, 제 나라 백성들한텐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나는 결코 안 돌아가려네.
- 제 1부 27 中 -
가끔 농장주가 소나 돼지를 도살하면 여자들이 달려가 채 식지 않은 내장과 꼬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었다. 농장의 멕시코인들은 그러는 여인들을 암캐라 부르며 낄낄거렸다. 손에 피를 묻힌 여자들이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와 국을 끓이면 아이들은 비린내에 취해 국솥 옆을 떠나지 않았다. 30도를 넘는 더운 날에도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벗지 못했다. 웃통을 벗어붙인 남자들은 술만 마시면 제 아내를 두들겨팼다. 벌써 노름을 시작한 이도 있었다. 노름과 술은 조선 남자들의 뿌리깊은 병폐였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악다구니와 울음소리, 비명과 고함이 밤마다 이어졌다. 유카탄은 남자들에게도 지옥이었지만 여자들에겐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 제 1부 34 中 -
이그나시오는 장화를 신은 발로 제단을 박살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그나시오는 발길질을 할 때마다 루가복음의 구절을 외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과 희열이 솟구쳤다. 마침내 부서지고 말고 할 것도 없는 허술한 제단이 완전히 무너졌다.
(중략)
바오로는 이그나시오와 똑같은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은 유카탄의 광신도와 조선의 신부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올린 그 기도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 제 1부 43 中 -
우리나라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메넴이 시가에 불을 붙였다. 여기는 당신네 나라가 아니오. 그리고 그가 정말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과연 당신들이 증명할 수 있겠소? 왜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을 붙여주는 줄 아시오? 그래야 아버지들이 제 자식이라고 믿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기 때문이오. 다시 말해 성은 아버지들의 불신에 대한 사회적 대가라는 거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남자들은 열 달 전에 저지른 어떤 일의 결과로 아이가 나온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20세기가 밝아왔는데도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오.
- 제 2부 59 中 -
이정은 가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국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이 시작되고부터 이미 멕시코엔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각자의 화폐를 찍고 다른 돈을 쓰는 자는 죽인다. 살육이 살육을 부른다. 힘을 가진 자들은 모두 멕시코시티로 진격한다. 그것이 곧 이 길고 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벌써 수십만이 죽었다. 이것은 국가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아니면 국가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 제 2부 68 中 -
어쩌면 우리 모두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왜놈이나 되놈으로 죽고 싶은 사람 있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차라리 무국적은 어때? 돌석이 말했다.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이정의 논리는 어려웠다. 그들을 설득한 건 논리가 아니라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이들은 신전 광장에 띠깔 역사상 가장 작은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신대한이었다.
- 제 3부 77 中 -
<마무리>
역사는 수천, 수만명의 일생을 함축해서 설명한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몇세기에 걸친 인류의 기록 속에 지워져버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들춰볼 수도 없다. '검은 꽃'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그 시대 우리 민족의 삶 중 일부를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준다. 소설로만 보이는 이야기가 불과 100년 전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을 거라는 추측만 해볼 뿐이다.
폐쇄된 공간과 단절된 소통 속에서 인간이 이뤄온 사회적 체제는 가장 먼저 무너진다. 신분, 나이, 성별과 무관하게 그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버티는게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 버텨온 각자의 삶들이 책 속 곳곳에 녹아있다. 주인공을 특정하기 힘들 정도로 각 등장인물들은 개개인의 사연과 성격이 세밀하게 나타난다. 현실적인 배경 설정과 심리 묘사는 독자들을 20세기의 멕시코로 옮겨 놓고, 그 속에는 권선징악도 해피엔딩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열강의 침략과 횡포에 시달리는 힘없는 조국을 떠난 이국민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떠나오기 전에도 약자였고 멕시코에 도착해서도 착취 당하는 위치일 뿐이었다. 삶과의 싸움에서 신념을 버리기도 하고 가족이나 동료를 등지면서도 동포라는 유대감을 놓지 못한 것은 약자들끼리 뭉쳐서라도 살아남고 싶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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