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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VIEW/고전 & 현대 문학

원하고 바라옵건대 - 김보영 외 / 줄거리 & 명대사

by 책 읽는 꿀벌 2024. 3. 29.

안녕하세요, 책 읽는 꿀벌입니다 : )

안전가옥의 옴니버스 시리즈 중에 신수 편을 들고 왔습니다.

사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작품도 있고, 안전가옥도 믿고 보는 편이라 시작부터 기대가 됐어요.

그리고 역시나 이번 앤솔로지도 다섯 편 모두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책소개>

저서 : 원하고 바라옵건대
저자 : 김보영, 이수현, 위래, 김주영, 이산화
발행일 : 2023.12.15
페이지 : 226p

 

 

<줄거리>

김보영 - 산군의 계절
이수현 - 용아화생기(龍芽化生記)
위래 - 맥의 배를 가르면
김주영 - 죽은 자의 영토
이산화 - 달팽이의 뿔

 

 

 

<명대사&구절>

"이 나라는 내 대에서 원래의 주인인 소서노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제 배를 닫는 것으로 찬탈과 수모의 역사를 끝낼 것입니다. 내 귀한 백성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내 땅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작은 짐승 하나 다치지 않고."

아아, 내 사랑스러운 아이, 소서노의 재림과도 같은 여인.

"산군이시여, 나 우은현을 지켜봐 주소서."

- 산군의 계절 中 -

 

네가 이겼다. 네가 이겼고 우리가 다 졌다. 그 길었던 혈통의 전쟁도, 여러 세대에 걸친 가문의 염원도, 그토록 많은 이들이 해 온 음모와 암투도 다 모래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내가 2백여 년간 싸워 온 일도, 열망했던 꿈도, 애태웠던 바람도, 네 살고자 함 앞에 다 헛일이 되고 말았다.

아,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 산군의 계절 中 -

 

용은 신령한 동물이라, 화생(化生)을 한다. 즉, 처음부터 용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동물로 태어났다가 오랜 수련으로 몇 단계의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다. 마치 알로 태어났다가 애벌레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는 것과도 같다. 잉어든 도마뱀이든 뱀이든 화생하여 용이 될 자질을 타고난 짐승을 용의 싹이라 하여 용아(龍芽)라고 불렀다.

- 용아화생기 中 -

 

새로 태어난 용은 20년도 살지 못하고 죽은 한 인간의 시체가 거센 바람에 날려 가는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눈을 돌려 세상을 보았다. 말라 죽어가는 나무들, 숨죽여 때를 기다리는 들풀들, 여윈 새끼를 보듬은 짐승들, 시체로 잔체를 벌이는 새들을 훑어보고 난 용의 시선이 인간의 세상으로 향했다.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혀 규를 때려죽인 마을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중략) 더 멀리 눈을 옮기면 가뭄으로 죽어 가는 이들을 외면하고 물을 끌어다가 참외며 다른 과일을 키워서 돈을 벌 생각만 하는 사람이 보이고, 또 그 사람에게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하며 웃는 관리들도 보였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제 몸까지 불태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끄러운 소리, 더러운 냄새, 넘치는 피로 세상을 채우는 인간들이 보였다.

- 용아화생기 中 -

 

"맥은 인간에게 해가 되는 신과 괴물과 요괴를 잡아먹었습니다. 나쁜 꿈을 잡아먹고 인간에게 이로운 꿈을 남겨 두었지요. 사람들은 점차 좋은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길 바라자 태양이 움직였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해줄 사람을 찾자 왕들이 나타났고, 떠나길 바라면 또 사라졌습니다. 세상을 재단하고 합리와 이성을 찾길 바라서 색목인을 상상해 냈습니다. 과학이 태동한 것도 모두 사람의 꿈이지요."

- 맥의 배를 가르면 中 -

 

하민의 말을 따르면 형상은 바람에 근거했다. 악마가 되었다는 건 악마와 같은 바람을 꾸었기 때문이고, 암군이 되었다는 건 암군과 같은 바람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기요가 사람을 잡아먹는 이무기가 되었다는 건 기요가 사람을 잡아먹는 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만족스럽나요?"

너의 물음에 기요는 사람으로 살찌운 집채만 한 몸을 비틀었고, 먹빛 비늘의 끄트머리만 서늘하게 번쩍였다.

"아니요."

"어째서죠?"

"이렇게 먹는데도... 아직 허기지니까요."

- 맥의 배를 가르면 中 -

 

“나랑 계약 맺을래?”
할머니가 불쑥 내뱉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를 정화해야만 하는 진묘수는 때로 이승에 오래 머물기 위해 인간과 인연을 맺는 계약을 한다. 계약으로 이어진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진묘수는 자유롭게 이승에서 지낼 수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눈동자가 마치 무명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섬뜩했다. 그 눈 안에 도사린 것은 인간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뿌리를 둔 존재가 뿜어내는 소름 끼치는 마력이었다.
“내가 네 피를 조금만 빨면 되는데.”
무명은 순간 뭐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죽은 자의 영토 中 -

 

트럭이 꼬마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도로를 선뜻 건너지 못한 꼬마의 부모가 넋 놓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도 변하는 건 하나도 없겠지. 꼬마가 죽는 편이 나은 것은 아닐까.

무명은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오만한 생각이었다. 인생의 다음 장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죽는 편이 낫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면 나는? 저승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삶의 다음 장엔 대체 뭐가 쓰여 있을까.

어떡해. 어떡하지.

"결정해."

진묘수가 재촉했다.

- 죽은 자의 영토 中 -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짐승을 쓰러뜨리기 위한 기술이라니, 그야말로 옛 성현들이 쓸모없다고 지적한 '용을 죽이는 재주'인 도룡지기(屠龍之技) 그 자체가 아니야? 어찌 그쪽은 도룡지기 따위를 시험하겠다면서 아까운 일생을 바치려 해?"

"그야 정말로 용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그 용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도룡지기를 배운 사람뿐일 테니까."

- 달팽이의 뿔 中 -

 

보아하니 흑삼릉이 베어 낸 철어의 촉수 토막 하나에 아직도 생기가 다하지 않은 듯하였다. 토막에는 주먹만 한 따개비가 하나 달려 있었기에 비늘에 스치면 작게 덜그럭 소리가 났는데, 그때마다 따개비 끄트머리에 이상하게 굼실거리는 움직임이 보여 흑삼릉의 시선이 문득 거기에 가닿았다. 자세히 보니 굼실거리는 것은 따개비가 아니라 그 주둥이 언저리에 빌붙어 살아가는 새끼손톱만 한 달팽이였다. 껍질은 투명하고 몸은 우유처럼 뿌연 것이 얼핏 보면 탁한 물방울이 묻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흑삼릉은 기이하게 여기고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기이한 것은 그 달팽이의 뿔에 있었다. 둥그런 머리 위로 튀어나온 두 자루의 뿔 끝에는 모래처럼 자글자글한 덩어리가 하나씩 붙어 있었으니, 뿔이 쑥 들어가면 와르르 흩어졌다가 올라오면 어느새 다시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흑삼릉은 그 덩어리의 정체가 실은 아주 자잘한 게를 닮은 벌레들이 모인 것임을 곧 깨달았다. 즉 하나하나가 먼지만큼이나 작아 눈에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는 미물들이, 곤의 비늘 틈에 사는 철어의 몸에 붙은 따개비의 주둥이에 둥지를 튼 달팽이의 뿔 위에서, 자기들이 구름 속에 있는지 바다 위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계속 바글바글 무리 지었다가 도망쳤다가 하는 것이었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그 모습을 한없이 응시하고 또 응시하던 흑삼릉이, 불현듯 깨우치는 바가 있어 속으로 가만히 혼잣말했다.
‘가장 커다란 곤의 일곱 배라. 저 작은 달팽이조차도 그 뿔에 빌붙은 게의 일곱 배보다는 훨씬 클 터인데, 고작 일곱 배라….’

- 달팽이의 뿔 中 -

 

 

<마무리>

동양의 신수에 대한 환상은 여타 다른 판타지 소재에 품는 기대감과는 다른 면이 있다. 인외의 초월적 존재라는 비현실성과 시대극이라는 두 가지 매력을 모두 충족하면서 동경과 선망, 일말의 희망을 담고 대하게 된다. 특히 인간과 어울리며 인간사에 영향을 끼쳐온 신수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인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욕망과 변심, 정, 순애, 희생, 열정, 박탈감 등. 이 앤솔로지에서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이야기들 속에 인간이 가지는 속성들을 다룬다. 신수는 상황에 따라 그것을 돕거나, 이용하거나, 그저 방관자처럼 지켜보기만 하기도 한다. 때론 인간적이고 다시 보면 한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처럼.

 

다섯 가지의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건 아이러니하게도 '산군의 계절' 속 우은현, '맥의 배를 가르면'의 기요, 혹은 '죽은 자의 영토' 속 무명의 엄마와 같은 인물이다. 그들은 어쩌면 작품의 주인공보다 비현실의 경계에 더 가깝게 다가서 있었을 것이다.

200년 동안 혈통의 전쟁을 해 온 소서노의 후예이자 결국 핏빛의 전쟁을 계략한 우은현. 그녀가 변했다거나 혹은 이해할만하다는 주장을 하려는게 아니다. 우은현은 어떻게 보면 가장 믿었던 밀우(산군)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이후 그녀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대를 이어 전해오던 산군의 보호와 축복을 이유도 모른 채 빼앗기고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억울하고 분통함을 짐작할 뿐이다.

기요는 꿈과 맥에 대한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어 수상했던 인물이었다. 맥의 배를 갈라 꿈을 다시 인간의 힘이 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게 들리기도 했지만 의뭉스러운 구석 또한 있어 지켜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결국 꿈을 되찾고 이무기로 완결이 난 기요는 식인으로 끝나지 않는 허기를 달래며 지낸다. 여기서 몽상가들이 모두 악한 존재로 완결 됐다는 점이 맥의 존재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나쁜 꿈만을 먹어 인간을 현재에 존재하도록 하는 맥. 하지만 그들은 왜 그 꿈을 꾸게 되었을까. 아무런 맥락 없이 그저 그들이 악하게 태어나서 그랬을 것 같진 않았는데, 꿈을 되찾겠다는 의지만으로 동물원까지 쳐들어간 기요와 몽상가들의 사연이 궁금해지는 엔딩이었다.

무명의 엄마는 갑자기 그녀부터 여자도 저승사자의 일을 하게 된 것부터 안타깝게 느껴졌다. 물론 여성의 인권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염라대왕이 여자인데 아직까지 여성 인권이 낮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긴 했다.) 왜 굳이 그 시작이 나일까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법하지 않은가. 게다가 무명처럼 어리지도 않아서 아버지가 명부를 조작할 수도 없다. 하지만 딸에게나마 그 운명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아버지의 말을 따라 무명을 밖으로 돌리는데 결국 그것도 도루묵이 된다. 

 

이렇듯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인물들을 눈여겨 보게 되는 까닭은 그들의 결말이 어딘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특별한 존재가 되길 바래 봤을 것이다.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신묘한 존재를 만나길 꿈꾸고 그들이 초월적인 힘으로 나를 도와주길 소원해보는 것은, 유한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인 것 같다. 그러나 모두가 그 바람을 이룬다면 그건 더 이상 소망일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작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등장인물들은 주인공 버프를 받지 못해도 또한 살아갈 것이다. 그 점이 불완점함을 품고 살아가는 현실의 사람들과 닮은 것 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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