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책 읽는 꿀벌입니다 : )
오랜만에 구병모 작가님 소설을 읽었습니다.
'아가미'에서도 느꼈지만 구병모 작가님의 작품은 인물 설정이 독특해서 초반 몰입도가 높은 것 같아요.
비유나 세밀한 묘사가 많아서 상상하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책소개>
저서 : 파과
저자 : 구병모
발행일 : 2018-04-16
페이지 : 344쪽
등장인물 : 조각, 투우, 해우, 류, 조
강박사, 장박사
<줄거리>
40년을 방역업(살인청부업)에 종사해 온 60대 여성인 조각(爪角)은 한 순간의 방심이 불러온 실수로 상처를 입는다. 혼미한 정신으로 에이전시와 의탁한 병원의 원장을 찾아가지만 새벽 병원에서 만난 건 원장인 장박사가 아닌 페이닥터 강박사다. 정신을 잃은 조각을 치료하고 이후 아무것도 묻지 않는 강박사의 모습에 조각은 묘한 감상을 갖게 된다. 이후 강박사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청과물 가게 찾아간 그녀는 강박사의 어린 딸을 보고 알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에이전시에서 가끔 마주치는 투우는 30대의 남성으로 최근 떠오르는 업자인데 종종 조각에게 괜한 시비를 건다. 조각은 퇴물이 된 본인을 조롱하는 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투우는 어렸을 때 가정도우미로 위장 취업한 조각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했고, 자신을 돌봐주다 홀연히 사라진 그녀에게 기이한 집착을 갖게 된다.
조각은 류와 조를 만나 처음 방역업을 하게 된 이후 죽이고 살아왔던 감정과 욕구들이 점점 스며드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투우는 조각이 신체의 노화로 인해 약해지는 것 뿐만 아니라 주변에 정을 주고 강박사에게 마음을 두는 것을 보면서 비틀린 불만을 품고 강박사의 딸 해니를 납치한다. 해니를 구하러 폐건물로 온 조각은 용병들을 처리하고 투우와 둘만 대치하게 되는데, 결국 둘 모두 치명상을 입게 된다. 투우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조각의 곁에서 마지막 위안과 함께 숨을 거둔다. 이후 은퇴한 조각이 자신의 작은 소망이었던 네일아트샵에 들러 네일을 받고 나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명대사&구절>
젊은 날의 자아 같은 건 이미 실현할 만큼 하고 나서, 설령 실행하지 못했거나 자아 자체가 애당초 없었다 한들, 가게 운영이나 부동산 알박기라는 노후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은 천만다행인 시절로서, 노후는커녕 이삼사십 대조차 무사통과하기 어려우며 그 누구도 어디에든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황의 시기다.
- 34쪽 中 -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은 이거 오래 못 해.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거짓말에서 비롯한 긴장이나 후회가 되었든 상관없어. 특히 모욕을 견디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 왜냐면 너는 여자고, 그만큼 현장에서 모욕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 51쪽 中 류 -
흥행을 위해서든 정치적 중대 현안을 덮기 위해서든 미디어에서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부채질하는 대로 휩쓸려 다니다가 바짝 긴장하는 순간이 지나고 나면, 복습과 주입에 무디어진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풀어져서 스스로를 위험에 방기하고 더 강한 자극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상태를 유지했다.
- 75쪽 中 -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 96쪽 中 -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과 그 변용이었다.
- 123쪽 中 투우 -
"목적. 글쎄. 내 목적이 뭘까요."
투우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귤을 짓밟자 터진 귤 냄새가 골목 안을 흥건하게 적시고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꼭 남더러 갈 곳을 끈질기게 묻더라. 당신 지금 자기가 뭐 하고 있는지 정말 알기나 해? 아는 건 단 하나, 목적지는 몰라도 하여튼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지."
- 216쪽 中 투우 -
(생략)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 254쪽 中 -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 342쪽 中 -
<마무리>
달이 차면 기우는 일만 남았다고 한다. 가장 찬란히 빛나는 순간을 지나 마주하게 되는 어두운 내리막길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낯설고 두려운 시간이다. 높이 올라간 사람일수록 내려오는 것이 익숙치 않을 것이다. 이건 우리의 커리어가 될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나 명성일 수도 있다. 또는 젊음이라는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지표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남는 것은 더 이상의 소용이나 가치가 없다고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뿐. 이러한 약함은 연민과 동정을 배우게 한다. 나의 정신과 신체가 마모되어 나약해짐을 느낄 때,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일상의 행복을 돌아보게 된다. 잘 벼려진 칼날 같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는 것처럼 사물과 동식물을 막론하고 우리는 시간 앞에 스러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 빛나고 사라지는 우리의 삶은 이중적인 의미의 '파과'라는 제목과 어우러진다. 그 사라짐과 변화를 인정하고 인생의 마침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조각의 모습을 닮고 싶다 생각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파과(破果) : 부서진 과일, 흠집 난 과실
파과(破瓜) : 여자 나이 16세 이팔청춘, 즉 가장 빛나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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